이경지(에세이스트) 밝음이 씻겨가는 날이다. 우중충한 하늘에 어떤 날은 시원하기도 어쩐 날은 춥기도 해서 갈팡질팡한다. 마음이 어지럽다. 종일 밝기만 하던 계절 속 갈증이었다. 햇빛의 따스함에 어쩐지 메말라가고 있었다. 당연한 맑음에 겁을 먹던 몸이 어두운 아침을 맞이하고서야 두 팔 뻗어 몸을 늘린다. 푹 꺼진 공기를 한 줌 삼키노라면 불안한 가슴이 진정된다.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를 껴앉고 눈을 감기도 한다. 대뜸 우산을 치워 일부러 얼굴에 비를 내리기도 한다. 어떤 사유로 갈라진 주름이 채워져 간다. 여기저기 두드리는 빗방울에 나를 다독인다. 물에 젖어 달라붙은 옷이 타인이 벗어준 옷자락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땅바닥을 때릴 듯이 내리는 빗소리가 할머니 손길 같을 때도 있다. 이런저런 걸음을 부닥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웃음이 삐져나왔다. 창문에 비친 저 꼴에 실례를 범하며 웃었다. 축축해진 바지를 잡고 있는 자세가 어정쩡해 위태로워 보인다. 물에 젖어 진해진 옷과 창백해진 얼굴 사이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우스꽝스럽다. 살아남은 푸석한 정수리를 위해 들고 있는 빨간 우산이, 이미 젖은 바지를 힘껏 부여잡고 있는 주먹에 실소가 터졌다. 소금기를 머금은 얼굴에 메마른 감정 하나가 삐쭉 튀어나왔다. 제주에서는 특정 시즌이 되면 비가 내내 내린다. 기상청도 맞추지 못하는 돌발성 비도 여기서는 또 다른 날씨에 불과하다. 익숙해진 사람들은 맞는 것에도 내성이 생겼다. 그렇다고 기분에 내성이 있진 않나 보다. 당연한 어둠이 일상인 곳이다. 사방팔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주체하지 못한 것들은 쉽게 망가진다. 돌담, 나무, 구조물 … 사람들은 싸구려 비닐에 건조한 희망을 바라다가 젖은 실패로 돌아가 금세 포기한다. 그것들은 힘껏 망가진 채 땅에 붙어있다. 비닐에 고인 웅덩이 때문에 날아가지도 못한 채 정박해 있다. 약간은 잔인하고 처절하게 보인다. 찢겨간 면과 꺾긴 철은 거미가 기어가는 것 같아 가끔 소름이 돋는다. 그들의 생명이 연장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고개를 숙이는 짓이다. 면이 눌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숙여 우산을 밀어야 한다. 마치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동아줄에 소원을 빌며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겠다. 적어도 도착지에 다다르기 전까지 망가지지 말라고 빌 테니까.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비닐을 볼 때마다 몸은 점점 기울어진다. 오히려 거센 비바람을 그대로 마주칠 때 강해진달까. 바람이 잦아들고 사람들의 고개가 젖혀 몇 개의 정수리는 하늘에 닿는다. 찬찬히 지나가는 사람들은 익숙한 듯, 쇠붙이를 비껴간다. 언제는 그렇게 찾더니 거들떠보지 않는 신세에 덩달아 웅덩이가 생긴다. 온몸이 젖은 채로 몸을 털었다. 남아있는 방울은 쓸모를 증명해 주니, 일부러 몇 개는 남겨두었다. 가만 보면 비를 피할 수 있다는 일말의 안심. 바람 몇 번에도 쉽게 무너질 안정감에 익숙한 듯 고개를 흔든다. 떨어진 빗물에 얼굴이 젖는다. 애써 피한 비를 고개를 털어 맞는다. 어둠이 덮친 날이다. 계절 속 계절이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어 난간에 기댔다. 들어오는 비에 바닥이 젖는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니 추적이는 빗소리가 가까워진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회색빛 하늘 속으로 들어갔다. 나를 웃게 하는 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날씨 따위가 내 세상을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려 들지 않았다. 어렴풋 들려오는 빗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냉큼 일어나 버선 발로 맞이했다. 뜻하지 않은 비일수록 선물이려나. 엉켰던 감정이 덩굴 덩굴 뻗어간다. 채도가 한 풀 죽은 건물 사이로 어둠이 스며든다. 내리는 빗물이 고여간다. 손가락으로 튕겨보니 바닥으로 방울이 털어진다. 다시금 손가락으로 튕겨보니 방울이 두 갈래로 퍼진다. 이음점에 고인 웅덩이를 마주 본다. 흔들리는 표정이 투영히 나를 비춘다. 짧은 몇 초 안에 흩어지고 모여 하늘로 퍼져간다. 잘 모르겠다. 떨어지는 건지, 날아가는 건지 때로는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길을 잃어버린다. 금방 포기하고 젖은 시선을 돌렸다. 뻗었던 덩굴이 시든 건물 사이로 튀어나왔다. 바닥에 깔린 공기 한 줌 마시고 귓 등으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건너 건너의 흐려진 건물을 보려 했다. 생각을 달리하면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지려나. 어쩐지 아른거리는 건 말라가는 빗방울이다. 이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내쉬는 숨과 동시에 두 갈래로 퍼진다. 삶은 누구에게나 실험이고 중독의 연속이다 이경지 인스타그램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