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인, HANAYO글. 박의령(피처 에디터) 하나요(花代)는 게이샤 세계에서의 연회비를 뜻한다. 꽃송이만큼 값을 친다는 의미로 한자를 읽으면 화대다. 일본 아티스트 하나요는 이름도 ‘花代’를 쓰며 실제로 게이샤 견습생이었다. 80년대가 막 끝날 즈음 게이샤가 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을 떠나 도쿄로 상경한다. 게이샤는 철저한 집단 생활을 하며 엄격한 수업을 받지만 하나요는 견습 중에 피어싱을 하고 몸에 무당벌레 문신을 새겼다. 폐쇄된 세상에 머무를 수 없어서. 게이샤라는 문화적인 외피를 가진 채 자신이 하고 싶은 여러 예술을 시작한다. 퍼포머, 음악가, 사진가 등 이름 하나를 붙일 수 없어 ‘예인’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게이샤에 관한 자서전을 펴낸 계기로 매거진 <The Fece>의 표지를 장식하면서 장 폴 고티에의 캠페인 모델에 서는 등 활동 반경이 넓어진다. 영국에서 게이샤로 무대 활동을 하고 프랑스 소르본에서 짧게 학업에 몸담기도 한다. <The Face>의 커버 모델로 서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뚜렷하고 꾸준한 행보 중 하나는 음악. 1992년 재패니즈 노이즈의 창시자인 메르츠바우(Merzbow)의 마사미 아키타와 바이어런트 온센 게이샤(Violent Onsen Geisha)의 마사야 나카하라의 협력을 얻어 무대에 서고 음악을 시작한다. 1995년에 낸 첫 음반 <まっ赤なしずく>는 이제 실물 CD를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마니악한 음반이었고 2000년에 발표한 <Gift>는 해외 레이블에서 낸 영어 음반으로 음악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린다. 그리고 2002년 바네사 파라디(Vanessa Paradis)의 ‘Joe Le Taxi’를 커버한 싱글 음반을 내며 정점을 찍는다. 음악 활동 초기. 키워드는 ‘롤리타’와 ‘멜랑콜리’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술 취한 채로 부르는 것 같은 일렉트로닉 ‘Joe Le Taxi’ 많은 활동을 하지만 그를 사진가로 기억할 일이 잦다. 얼마 전 활동 30년을 기념하는 사진집이 나왔고 여전히 성실하게 사진전을 연다. 그가 사진 활동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주변사람들 조차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중학생 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올림푸스의 하프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모아 1995년 첫 사진집 <ハナヨメ>(하나요메)를 냈다. 사진계는 앞다투어 책과 전시를 기획하고 패션 업계도 그를 반겼다. 가끔 곰팡이가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지 않나? 푸르다 못해 하얗게 질려 버릴 것 같은 장면들. 만화경 속 풍경처럼 색채의 난반사가 구석구석 뿌려진 하나요의 사진은 그때까지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들을 눈앞에 펼쳐놨다. 천진할 정도로 기교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독자적인 사진. 지금 보면 로모그라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로모그라피가 유행한 건 사진집에 나온 지 10년 정도 후다. 30여 년 동안 그의 사진은 변함 없다. 거창한 주제 없이 본인이 속한 세상을 바라보고 필름이 내놓는 화학반응을 즐긴다. 세대가 거듭되어도 그의 사진은 정식으로 채택되지 못한 교과서처럼 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의 교본이 된다. 30주년 기념 사진집 <Keep an Eye Shut>에서 첫 사진집 <하나요메>는 영국으로 떠나기 전 도쿄와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담고 있다. 하나요의 스타일을 말해주는 여러 사진들 하나요의 사진집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MAGMA>. 독일인 남편과 낳은 딸 텐코(点子)는 하나요가 가장 많이 찍은 피사체다. 10년도 더 전에 후쿠오카의 중고 서점에서 산 <MAGMA>는 아직까지 거실 책장 한 가운데 정면으로 꽂혀있다. 결혼 생활을 하던 베를린에서 찍은 사진은 어쩐지 쓸쓸하고 바래서 사라질 것만 같다. 로모그라피와 작업한 적이 있다. 하나요는 현역이다. 한 젊은 사진가는 그의 사진을 보며 ‘그 속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Harper’s Bazaar>의 피처 디렉터다. 가장 호기심 많았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익힌 것들을 아직 좋아한다.가끔 사진을 찍고 믹스 테이프를 만들기도 한다. 박의령 인스타그램 피드백 남기기